내가 참은 감정은 어디로 갔을까?
모든 감정을 표현하며 지낼 수는 없으니, 상황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감정은 참는 경우가 많다. 그 순간을 넘긴 감정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이번 호에서는 감정을 참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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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 장석주, <대추 한 알>

 

성숙한 사람은 감정 조절을 잘한다.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감정 기복이 크지 않아 기분이 많이 좋을 때도 없고, 많이 나쁠 때도 없는 사람은 감정 조절을 잘하는 것일까? 기분 상해도 자기감정을 잘 숨기고 상대방을 맞춰 줄 수 있는 것을 의미할까? 순간 욱하는 감정이 올라 와도 심호흡 하며 이성적으로 자기감정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일까? 배가 고파 예민한 상황에서 신경질을 내지 않는 것도 중요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순간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을 억제하고 다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감정 조절이라고 한다. 감정 조절의 첫 단추는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다. 즉,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인식은 하지만 화를 참는 것이 억제다.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이 감정 조절의 관건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한 번 감정을 다 참아 보면 어떨까?

 

‘자아고갈(Ego depletion)’은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가 제안한 유명한 심리학적 개념이다. 행동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자아의 힘은 그 양이 한정적이어서 감정을 참는 것에 힘을 과하게 사용하면 다른 곳에서는 자아의 힘을 쓸 수 없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보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M 씨는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이 긴장된 상태다. 원래 자신의 모습과는 다르게 싹싹한 행동을 주로 보이며 웬만한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어도 웃어넘기고 밝은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며 일을 한다. 전문인으로서 철저한 자기 관리를 위해 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주 3회 운동과 취침 전 어학 공부도 꾸준히 챙기며 영양제를 털어 넣는다. 일과 사람에 치여 녹초가 된 어느 날, 모든 힘이 바닥 난 상태로 집에 도착한 M 씨는 양말을 벗을 힘조차 없다. 어머니가 말을 걸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운동, 공부, 영양제의 하루 루틴을 모두 내팽개친 채 밤늦게 매운 족발을 시켜 먹는다. 자제력을 모두 다 써 버린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다양한 버전의 심리학 실험들로 자아 고갈 현상을 증명했다.

사람들에게 분노나 짜증을 유발시킨 후 그 감정을 억누르라고 한 후 악력을 측정했더니 악력이 약해졌을 뿐 아니라 술을 과음하게 되었다. 감정을 억제하느라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버린 나머지 신체적 힘과 행동 조절력을 잃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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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감정을 참은 대가를 어디선가 치르기 마련이다. 그 대가는 나도 의식하지 못한 채 어디선가 줄줄 새고 있을지도 모른다. 운전하다 별일 아닌 것에 욱하며 과도하게 화를 내거나, 전혀 구매할 생각이 없었던 취미 용품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구매하거나, 나도 모르게 자제력을 잃고 창피한 모습을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참은 감정은 증발하지 않고 나의 다른 힘을 고갈시켜 버린다. 전반적인 자제력과 조절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감정 억제에 힘을 덜 쏟을 연습’과 ‘감정을 억제하느라 고갈된 힘을 충전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감정 억제에 힘을 덜 쏟기 위해서는, 스스로 감정을 잘 참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어느 정도는 내려놓는 것이 좋다. 감정은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어서 힘을 주면 줄수록 더 새어 나올 뿐이다. 감정이 상하면 상하는 대로,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스스로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 당황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상황이라면 ‘앗, 자꾸 얼굴이 화끈거려서 큰일이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야지’라는 생각보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니 내가 지금 많이 당황했나 보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라고 감정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는 표현하는 것이 억지로 참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감정을 억제하며 다 써버린 힘을 충전하기 위해서는,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지인들과의 대화 혹은 책, 영화 등의 간접 체험을 통해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계기를 만드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것은 한강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 뿐더러 스스로 소진되는 면이 크다. 종로에서 뺨을 맞으면 종로에서 추스를 수 있도록 평소에 감정을 인식하는 훈련과 충전을 해 두자. 그렇게 우리는 더 깊이 성숙해진다.

Profile
최은영 임상심리전문가/ 정신보건임상심리사

기업과 사람의 정신건강을 위해 마음으로 다가가는 기업정신건강 힐링멘토. 연세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임상심리학을 공부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임상심리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그 직후에는 심리진단, 평가 영역에서 경력을 쌓았다.
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업무뿐 아니라 다양한 심리적 문제들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주로 기업 내 심리상담 및 심리치료 현장에서 발로 뛰어왔다. 다수 대기업, 공공기관, 외국계 기업에서 상담, 위기 개입, 교육을 진행했고, 근로자를 위한 정신건강 관련 글을썼다.
현재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전임상담사로, ‘CIM Care Program’에 참여해 삼정KPMG 구성원들의 스트레스 관리 및 마음 치유를 위한 상담을 진행 중이다.